과거 파워레인저로 마음을 불태우던 시절, 그룹에 대한 동경은 그때부터 시작됐던 거 같습니다.
앤트워프 6는 벨기에에 위치한 앤트워프 왕립 예술학교에서 80년대 초에 배출한 가장 잠재력 있던 6명의 그룹을 일컫습니다.
앤 드뮐미스터(Ann Demeulemeester), 더크 반 샌(Dirk Van Saene), 마리나 이(Marina Yee), 드리스 반 노튼(Dries Van Noten), 월터 반 베이렌동크(Walter Van Beirendonck), 더크 비켐버그(Dirk Bikkembergs) 6명으로 구성된 앤트워프 6와
함께 거론되는 한 명이 더 있습니다.
같은 졸업반 출신이었던 마틴 마르지엘라(Martin Margiela). 마틴은 졸업 후 그룹에 동행하지 않고 장 폴 고티에 아래서 일했으며 그들에 버금갈 만큼 인재라고 불렸습니다.
오늘은 그들이 쌓아온 아카이브와 근황들을 방대하지만 아는 선에서 최대한 간결히 소개해보려고 합니다.
1. 앤 드뮐미스터(Ann Demeulemeester)
얘기하기 앞서 70~80년대 패션과 문화를 짚고 넘어가자면 70년대에는 대량생산 패션이 발달하고 2번의 오일쇼크로 많은 나라가 휘청이던 시기입니다. 이러한 정세 때문에 자연스레 오트 쿠튀르가 프레타 포르테(기성복)에 밀리면서 테일러 기반 디자이너 브랜드보단 D&C 브랜드에 대한 관심이 늘어갔습니다.
또한 휘청이는 기성세대에 대한 반발로 펑크, 포스트 모더니즘적 패션, 변질된 스킨헤드 같은 반문화가 잇따랐고 70~80년대 디자이너들은 이를 기반으로 침울하면서 동시에 불타오르는 무질서한 옷들을 만들어 내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반문화에 더불어서 80년대에 파리에 진출한 일본 디자이너들이 (지금으로 말하자면) 해체주의풍의 디자인을 선보이며 미의 기준을 흔들었고 앤 드뮐미스터는 앞서 말한 2가지 흐름에 일조한 디자이너 중 한 명입니다.
1985년,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브랜드를 설립한 앤 드뮐미스터는 이듬해 86년에 앤트워프 6의 일원으로 런던에서 처음 컬렉션을 선보였습니다.
그녀는 대칭보다 비대칭 속에서 안정감을 찾습니다. 인간의 몸은 원래 대칭적이지 않고 무심하면서 자연스러운 실루엣은 모두 비대칭에서 나온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1차적으로 보이는 장식적인 요소보다는 의복에 가장 기본이 되는 구조, 패턴에 신경을 많이 쓰는 디자이너이기에 어질러진 공간감 속에서 안정을 유지하는 의복 , 부피감과 실루엣 속에서 피어나는 레이어링을 중심으로 그녀의 컬렉션을 보면 꽤나 재밌을 겁니다.
그녀가 여성복 라인에 남성복을 넣어 컬렉션을 진행해온 걸 보면 옷에 있어서 성별에 구애받지 않습니다.
기존의 질서 무시와 비대칭, 불완전함에서 앤드로지너스*로 표현되는 예술적 창조를 재대로 보여준 디자이너라고 생각합니다.
앤드로지너스* : 남성과 여성의 특징을 모두 소유함
지금의 앤 드뮐미스터에는 흡사 질샌더 없는 질샌더, 홍철 없는 홍철팀, 앙꼬 없는 찐빵 같이 앤 드뮐미스터가 없습니다. 2013년 11월에 그녀가 떠난 후 현재는 마틴 마르지엘라 출신 디자이너 세바스티엔 뮈니에르가 앤 드뮐미스터를 총괄하며 그 전보다 색이나 원단에 있어서 더 다채로운 컬렉션을 보여주는데 킴 존스나 버질같이 브랜드의 이미지를 자신의 색깔로 완전히 개편하지는 않고 과거 앤 드뮐미스터의 컬렉션에서 영감을 찾는 등 브랜드 이미지를 최대한 보존하는 행보를 보이고 있습니다.
2. 더크 반 샌(Dirk Van Saene)
한국에선 정말 베일에 싸인 디자이너입니다. 그의 인지도와 더불어서 그가 만드는 옷들이 대부분 샵을 운영하는 일부 지인들에게만 뿌려지다 보니 온라인 판매는커녕 중고 매물로도 올라오기 힘든 옷들이 대부분입니다. 아무래도 꾸뛰르적인 성향이 강한 디자이너여서 그런지 자신의 예술 사조를 이해하는 사람들에게만 팔아달라는 모종의 당부처럼 보입니다.
눈속임 기법인 트롱프뢰유(Tromp-loeil)에서 영감을 받은 옷, 꾸뛰르가 섞인 듯 한 예술적인 옷 등 재밌는 옷은 많아 보이지만 옷 자체를 인터넷으로 찾아보기 힘든 게 안타까운 사실입니다. 2000년대부터는 월터 반 베이렌동크와 앤트워프 패션 잡지 A Magazine의 전신인 N°A Magazine을 편집하거나 세라믹 예술 사업을 하는 등 여러 방면에서 활동하였고..
2013년엔 자신의 이름을 딴 DVS 부티크를 차려 자신의 작품과 다른 브랜드들의 컬렉션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그가 작년에 개최했던 전시를 살펴보면 현재는 이런 패션과 세라믹이 섞인 복합예술에 뜻이 있어 보입니다.
3. 마리나 이(Marina Yee)
어쩌면 월터 반 베이렌동크보다 예술에 가까운 옷을 내는 사람이 마리나 이 일지도 모르겠습니다.
86년에 앤트워프 6의 구성원으로 런던 컬렉션에서 자신을 입증시켰지만 88년에 그룹을 떠나 앤트워프 6중에선 가장 인지도가 없다고 알려진 디자이너입니다. 재정적 문제와 그녀의 완벽주의로 인한 컴백과 잠적기의 연속에서 2018년, 13년 만에 한 샵에서 컬렉션을 선보였습니다.
그 샵은 일본에 위치한 Laila Tokio. 헬 무트랭, 마르지엘라, 꼼데가르송 같은 브랜드들의 빈티지 아카이브 옷들을 파는 그곳에서 그녀의 옷들은 M.Y. project라는 이름으로 선보여졌습니다. 그녀가 13년 만에 보여주고 싶었던 컬렉션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창의성이 타협된 대량 생산 시스템, 영혼 없는 패스트 패션의 과잉공급을 늘 경계해왔던 그녀는 그에 맞춰 마이크로 컬렉션이라는 이름으로 평생 입을 수 있는 소량의 옷들을 선보였습니다. 경력 초반부터 지속가능성 디자인을 추구했던 그녀가 몇십 년이 지났어도 자신의 신념대로 옷을 만드는 게 참 멋있다고 생각이 드네요..
https://laila-tokio.com/online/brand/502/
LAILA TOKIO
laila-tokio.com
그녀의 디자인은 우리가 아는 아이코닉한 아이템에 업사이클링이라는 요소를 넣어 '이 옷이 이런 매력도 가지고 있구나.' 같은 영감을 줍니다. 마치 디테일의 연속처럼 보이는 옷들은 어느 부분 하나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게끔 하는데 그 과정 속에서 벌어지는 원본과의 비교에서 디자인의 묘미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한 때 정말 좋아했던 그리고 지금도 좋아하는 디자이너이기에 앞으로 컬렉션을 조금은 더 내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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